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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냥본색

김연아 선수에게 은퇴란 말은 이제 그만

 밴쿠버 올림픽 전부터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김연아 은퇴설'은 올림픽 끝난 후부터 3월 말의 세계 선수권 대회를 거쳐 두 달 간의 국내 체류기간까지 줄곧 김연아를 따라 다녔다.
 김연아 선수는 어쩌면 올림픽 우승에 대한 축하 인사보다 은퇴 여부를 묻는 질문을 더 많이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2개월 간의 국내 일정을 마무리 짓고 다시 캐나다로 떠나는 김연아 선수의 출국 기자회견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김연아 선수에게 가장 집중적으로 쏟아진 질문은 바로 그녀의 '은퇴'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자회견 후 대부분의 언론이 내보낸 기사 제목들도 하나같이 '은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었다.
  
 12년을 준비해온 올림픽이었다.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연기로 얻어낸 우승은 혹독한 훈련과정과 험난한 장애물들을 뛰어넘어 힘들게 이루어낸 영광스런 결과물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걸 쏟아부어 이룩한 성공이었단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꿈꿔온 일이 더이상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는 그녀에게, 일단 좀 쉬면서 자신의 새로운 목표와 미래에 관해 차근차근 생각해보고 싶다던 그녀에게 물어볼 말이 기껏 은퇴에 관한 것밖에 없었을까?
 꼭 그렇게 '은퇴'라는 말에 집중, 아니 집착해야만 했을까?

 지난주에 방영된 '무릎팍 도사 - 김연아 1편'에서 올림픽 경기 후일담을 들으면서 새삼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있다. 그것은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우승 후의 소회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득하게 풀 만한 기회가 충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올림픽 후 수많은 인터뷰 기회가 있었고, 두 달 간의 국내 체류기간 동안 거의 매일 언론에 노출되었지만 정작 올림픽 이야기를 김연아 선수의 입을 통해 차근차근 들어볼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국내 체류기간 동안 김연아가 출연한 유일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무릎팍 도사'조차도 M본부 파업으로 인해서 녹화된지 한참 지난 후에 전파를 탔으니 말이다.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며 더 행복해해도 좋았을 올림픽 우승의 기쁨은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웬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올림픽 직후에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와 바로 김연아 경기 당일에 발생한 천안함 사건이 큰 변수로 작용했다. 그리고 전소속사와의 계약종료를 앞두고 언론에 유포되었던 갖가지 악의성 기사들, 일본발 피겨 룰 개정안 등의 문제들도 우승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데에 한몫했다.

 올림픽 프리 경기가 있었던 날, 밴쿠버의 한 호텔방에서 열린 간소한 파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오서 선생님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연아가 금메달을 딴 날 밤은 굉장히 간소했어요. 연아는 정말 수수한 아이거든요. 화려한 파티를 하지도 않았어요. ...... 연아 어머니, 아버지, 에이전트, 데이빗 윌슨, 저와 연아가 함께 있었는데 연아가 우리에게 메달을 걸어주고 우리를 안아주고, 훈훈한 시간이었죠. 각자 간단히 이야기하는 동안 모두가 서로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그런 정도. 호텔에서의 정말 간소한 밤이었어요. 특별하거나 화려한 것도 없었지만 굉장히 감동적이었지요. 연아 부모님이 연아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이야기할 때 연아가 굉장히 감동했고, 데이빗과 저에게 감사하다고 말해주셨고, 연아는 울고...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KBS 감성다큐 미지수 중에서 - 2010.3.27 방영)"

 연아의 입을 통해 듣는 그날밤 이야기는 좀 더 감동적이었다. 연아와 어머니에게 "우리를 믿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는 오서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서 연아는 눈물을 흘렸다.

 "국적이 다른데...... 눈물이 막 나는데...... 그냥 막 고마웠어요, 다들. 코치들도 엄마도 나의 제자와 나의 딸이 그 꿈을 이루는게 꿈이지만, 어차피 저의 꿈이잖아요. 그걸 이루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북받치는 울음에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 눈물에는 진심이 어린 깊은 감사가 묻어났다.
 올림픽 프리 경기 직후 자신도 모르게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울었다는 이야기도, 어렵고 힘겨웠던 훈련 과정과 부상에 관한 이야기도 밝게 웃으며 툭툭 던지듯 가볍게 말하던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한몸처럼 있어준 어머니와 코치들 이야기를 하면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보인 것이다.
 무릎팍 도사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수많은 눈물 중 하나였지만, 연아의 눈물은 뭔가 달랐다. 그래서 더 특별하고 아름다웠다.

 한참 후에야 듣게 된 그날밤 이야기였지만, 마치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졌다. 
 연아에게도 '무릎팍 도사'가 그동안 미처 다 풀지 못했던 회포를 마음껏 풀어낼 수 있었던 자리였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두 달 간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두 달을 기약하고 떠나는 자리에서까지 '은퇴'에 관한 질문만 지겹도록 받아야했던 연아에게 웬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놈의 '은퇴' 이야기는 내가 들어도 그렇게 지겨울 정도인데, 가는 자리마다 '은퇴' 질문을 들어야 했던 연아는 얼마나 더 지긋지긋했을까?

 
 "선수로서 오를 수 있는 자리까지 갔기때문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경기에 압박감 없이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여러 캐릭터를 보여드렸는데 아직 보여드리지 못한 것도 많으니 앞으로 더 다양한 캐릭터를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명료하고 확실하게 자기 소견을 밝혔는데, 언론은 여전히 찜찜한 반응이다. 그들이 그토록 집착하던 그놈의 '은퇴'에 관하여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캐나다로 가서 훈련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퇴'는 아니라고 확실히 밝혔고, 시즌이 시작되는 시점의 준비 상태와 몸 컨디션에 따라 경기 출전 여부는 다시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 표명은 현재의 김연아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면서 또한 가장 솔직한 답변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에 지금 꼭 올 시즌 경기에 출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다고 하더라도 시즌 시작 시점에서 그 입장이 충분히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2006년 세계선수권대회 후 컴피티션 무대를 떠났던 미국의 샤샤 코헨의 경우, 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그랑프리 시리즈를 통한 복귀를 떠들썩하게 알렸다가 부상을 이유로 출전을 취소하고 2010 US 내셔널 무대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밝힌 입장을 두고 애매한 입장 표명이라며 여전히 마뜩잖아하던 기자들은 몇일 전 국내에서 열리는 아이스 쇼 출연을 위해 방한한 아사다 마오에게까지 김연아의 은퇴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연아 컴플렉스'에서 못벗어나고있는 아사다의 일관성 없는 답변 또한 실소를 자아낸다.



 지난 4월 올림픽 공원 체조 경기장에서 열렸던 2010 페스타 온 아이스의 오프닝 무대에서 김연아의 등장과 함께 스크린에 떠오른 문구는 바로 다음과 같았다.

 "저는 행복한 스케이터입니다."
 
 짧은 문구였지만, 이 말은, 늘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한 소녀 피겨선수가 그동안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사랑해준 팬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메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야 비로소 행복한 스케이터가 되었다고 말하는 연아에게 왜 자꾸만 은퇴를 이야기 하는건가요?

 그놈의 '은퇴' 얘긴,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