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과 결혼한 신데렐라는 그림같은 궁전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신데렐라의 신분과 성장배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왕비와 혹독한 고부갈등을 겪지는 않았을지.
독사과의 마법에 빠진 자신을 단한번의 키스로 깨어나게 해준 왕자와 급하게 결혼식을 올린 백설공주의 결혼생활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문화적 차이와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경 위기를 맞진 않았을까?
특별나게 독특한 생각과 취향을 갖고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개 해피엔딩을 좋아할 것이다. 온갖 고초를 겪고 험난한 위기를 헤쳐가는 드라마 속 주인공에 몰입되어 함께 울고 웃으면서도 가장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바로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결말, 그중에서도 '행복한 결말'일 것이다.
한국시각으로 2010년 2월 26일 오후 1시 30분이 조금 못된 시각, 세계 피겨 역사에 길이 남을 무결점 연기로 프리 프로그램을 마친 연아가 불끈 쥔 두 주먹을 허공에 날리며 환희의 눈물을 흘렸을 때 함께 울며 기뻐했던 사람들은 역사적인 해피엔딩을 목격했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음을 알았기에 그 엄청난 성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기쁨 또한 클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연아의 기승전결을 가슴 졸이며 지켜왔던 사람들에겐 너무도 완벽한 결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행복을 맘껏 만끽할만한 충분한 시간을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 일상을 흠뻑 적셨던 행복감은 몇일 안가서 무기력한 포만감으로 변해버렸다.
해피 엔딩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던 탓일까? 행복한 결말 이후에도 똑같은 시간이 흐르고, 똑같은 일상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한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해피 엔딩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이었던 것이다.
행복한 결말의 당사자였던 연아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최고의 결과를 얻어낸 올림픽 후 세계 선수권 대회까지 한달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완전히 비워져버린 몸과 마음을 다시 채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본인의 표현대로 '말아먹은' 쇼트 프로그램을 지켜보면서 물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연아의 고충을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클린은 아니었지만 잘 싸워낸 프리 프로그램을 무사히 잘 마쳤을 때에야 비로소 이 삼촌승냥이도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고 한동안 나를 무겁게 따르던 무기력한 포만감도 시원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정말 만족스러웠던 완벽한 풀 코스 정찬 후 뒤늦게 배달된 피자 상자 같았던 '세계 선수권 대회'.
평소 같았으면 정말 맛있게 먹었을 먹음직스런 피자였지만, 풀 코스가 가져다준 포만감을 이길 정도로 매혹적이진 않았다.
첫 조각을 먹을 땐 포만감 때문에 맛있게 먹지 못했는데, 두번째 조각은 그래도 비교적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평소처럼 최고로 맛있게 먹진 못했지만, 결코 나쁘진 않았다.
중요한 건 최고의 풀 코스 정찬을 최고로 맛있게 먹은 후라는 사실이다.
결과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었다.
피자를 먹은 직후, 뒤늦게 풀 코스 정찬이 차려질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세계선수권 대회 후 올림픽 경기 녹화 화면을 다시 돌려보면서, 올림픽에서 연아가 보여준 선전이 얼마나 더 대단하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아사다 마오의 쇼트 연기 후 호들갑을 떠는 타라소바를 슬쩍 피하며 썩소를 날리다가는 이내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던 장면을 보면 아직도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트리플 악셀 컴비네이션을 랜딩하며 나름대로는 최선의 연기로 기선을 제압하려던 아사다 마오의 기세를 꺾으며 누가 최고인지 확실하게 보여준 통쾌한 쇼트 프로그램.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를 전해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가 숨죽인 4분 10초 동안, 여왕의 기품있는 연기를 완벽하게 펼쳐낸 프리 프로그램은 다시 돌려볼 때마다 너무 자랑스럽고, 이런 역사적인 퍼펙트 프로그램을 남겨준 여왕님께 그저 감사한 마음 뿐이다.
최고의 무대에서 펼친 최고의 연기로 얻어낸 최고의 성적.
더이상 바랄게 뭐가 있단 말인가?
어제 발표된 '2010 Time 100'에 만 열아홉의 한국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가 영웅(Hero) 부문에서 빌 클린턴 전美대통령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녀의 어릴 시절 영웅이었던 '미셸 콴'의 추천사가 감동을 더한다. 추천사의 마지막 문구가 특히 가슴에 와닿는다.
'A dream and journey are just beginning'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눈부신 성공이 가져다 준 환희와 영광을 가진 채로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허나, 그녀는 절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녀의 한마디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그녀가 이미 가진 것만으로 얼마든지 화려한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녀는 기다려달라고 말한다.
다시 기다릴 것이 있어서 나는 좋다.
올림픽 전부터 불거져 온 은퇴설에 나 역시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세계 선수권대회가 연아가 출전하는 마지막 컴피티션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고 연아가 확실하게 밝힌 계획도 없지만, 뭔가 기다릴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작은 행복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연아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꿈과 열정이, 새로운 목표와 계획이 자라나고 있지 않을까?
누구든 자꾸 묻지 말고, 그냥 기다렸으면 좋겠다.
한때, 재계약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안좋은 기사를 유포하여 연아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려했던 IB 스포츠도 몇일 전에는 연아의 독립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동안 연아로 인해 회사가 이룬 성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전국민적인 정서를 고려해서라도 그쯤에서 그만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기서 더 하신다면 회사의 미래에도 결코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는것은 회사측에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된다. 회사에서 내보내신 기사의 내용대로, 그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보여주신다면 회사 이미지에도 큰 플러스가 될 것이다.
동화 속에서건 현실 속에서건 해피 엔딩은 결코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
전편의 감동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꿈과 열정으로 충만한 '퀸연아 씨즌2'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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