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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마니아

달달한 로맨틱 사극 '동이'가 좋다!

 전형적인 이병훈표 사극의 모양새를 따라가면서도 어딘가 다른 맛과 향이 나는 MBC 월화 사극 '동이'가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이병훈 감독의 페르소나들이라 불릴만한 배우들에게는 전작들의 환영이 겹치면서 그 익숙함이 반갑기도 하고, 익숙함 위에 덧입혀진 낯설음이 생경스럽기도 하다. 그들은 전작의 캐릭터를 그대로 안고오거나 때론 뒤바뀐 성격을 갖기도 하는데, 신분의 변동과 함께 미묘하게 변화된 이미지를 찾아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새로 투입된 배우들도 점차 이병훈식 어법과 화술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제 16회를 넘긴 드라마 '동이'는 얼핏 봐도 이병훈표 사극이 틀림없다. 무거운 의상과 장식에 무거운 표정과 말투로 잔뜩 무게를 잡는 엄숙한 사극에서 가볍기 그지없는 시트콤 유머가 나와도 이제 우리는 별로 당황하지 않는다. 이미 이병훈 감독의 전작들을 통해 그런 유머들에 익숙해져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웃음코드의 수위가 좀 더 높아졌다. '동이'에서 가장 큰 웃음을 주는 인물은, 장악원 개그 콤비 주식-영달도 아니고, '부러우면 지는거다'며 심술마저도 코믹한 감찰궁녀 애종도 아닌, 그 존재 자체가 지엄하신 숙종 임금님이다. 제일 높으신 분이 그렇게 대놓고 웃기니까 정말 말도 못하게 웃기는거다. 우리가 봐왔던 기존의 사극에선 그야말로 상상도 못했던 일이 아닌가 말이다.
 
 이병훈 감독 역시 이번 작품을 전작들과 차별화시키는 전략적 인물로 숙종을 꼽았다. 이병훈 감독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군주였던 숙종을 행동에 크게 제약 받지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던 카르스마 있는 왕의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미드 매니아라 밝힌 바 있는 이감독은 미국 드라마 '튜터스' 속 '헨리8세'를 모티브로 신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궁녀들과 농담도 서슴없이 주고받는 로맨틱한 멋이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감찰부의 천부적인 능력자로 떠오른 동이에게서는 지난해 이병훈 감독이 깊이 빠져있었다는 미드 '멘탈리스트'의 '패트릭 제인'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동이' 속 '숙종'이 로맨틱한 깨방정 이미지만 있는건 결코 아니다. 젊은 열정이 살아있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나이 많은 신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서인과 남인의 권력 분쟁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역으로 왕권을 강화해가는 똑똑한 임금의 모습도 보여준다. 잠행을 통해 민심을 읽고 신분의 귀천이나 당파를 떠나 능력있는 자를 알아보고 중용할 줄 알며 아첨으로 포장된 간언보다는 불편하지만 올곧은 충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현명한 CEO로서의 숙종의 모습은 바람직한 지도자 상을 두루 갖추고 있다. 또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리더가 갖추어야 할 미덕과도 닮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병훈 감독의 전략은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지금껏 사극에서 봐왔던 왕들 중 가장 매력적인 왕으로 탄생한 숙종 캐릭터는 드라마 '동이'를 끌고가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에너지원이다.



  아직은 상궁의 자리에 있는 장옥정도 우리가 알고있던 '장희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왕가의 지성이나 통찰력과는 상관없이 표독스럽고 극성맞은 인물로 묘사되었던 장희빈의 모습은 드라마 '동이'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기존의 장희빈 관련 사극에서 그려진 희빈 장씨는 위험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 일색이었다. 그래서 그 치마폭에 둘러싸인 숙종의 모습은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의 장상궁은 똑똑하고 매력이 넘쳐서 그녀를 향한 숙종의 사랑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오히려 정치적인 목적으로 상대를 이용하는 쪽은 숙종이다. 이미 극 초반에 숙종은 서인의 세력을 견제하고 남인에게 힘을 실어줄 목적으로 정상궁에게 후궁첩지를 내리려 한다는 자신의 속내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 속의 숙종은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나 기존 사극에서 그려진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과는 달리 복잡한 여인관계 속에서도 휘둘리지않고 오히려 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강단있고 냉정한 면모를 보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동이'의 시대적 배경은 사극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시대 중 하나이며, '숙종'을 둘러싼 여인들의 다툼은 우려먹을대로 우려먹은 사골 스토리이지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이렇게 색다른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사골국의 주재료가 되는 뼈와 고기 같은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아니라 사골국을 시키면 그냥 딸려나오는 공기밥 같은 존재였던 최숙빈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도 꽤 파격적이다. 하지만 드라마 '동이'는 그런 단순한 시선 이동에 머물지 않는다.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인물 해석으로 좀 더 친근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인물로 되살아난 주인공들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좀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늘 근엄한 자태의 임금님만 보던 시청자들은 조금 풀어진 모습, 심지어는 망가진 모습까지 목격하면서 좀 더 친근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되고, 왕의 은밀한 로맨스까지 가까이서 엿보는 짜릿한 경험을 한다. 지금껏 사극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장악원이나 감찰부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 또한 색다른 재미이다. 
 너무 많이 우려먹어 더 이상 우려낼 게 없을 것 같았던 사골 이야기로 이렇게 색다른 맛과 향을 낼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사극의 대가다운 솜씨이다.
 

 다 아는 이야기, 모두가 결말을 알고있는 뻔한 스토리에 흡인력있는 생동감을 불어넣은 새로움이 '동이'가 가진 미덕의 전부는 아니다.

 '동이'가 좋아진 진짜 이유는 바로 극 전반에 흐르는 밝고 명랑한 기운이다.

 '그날의 갈등은 그날에 푼다'는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주인공 '동이'를 둘러싼 위기와 갈등은 너무도 쉽고 빨리 풀린다. '동이'와 자주 비교 대상이 되는 '장금이'가 겪은 고난과 역경에 비하면 '동이'의 고생은 고생이랄 것도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허망하게 떠나보낸 것은 장금이나 동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동이는 장금이와는 조금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했다. 물론 동이가 처음 궁에 들어온 목적은 아버지와 오빠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줄 단서를 갖고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항아님을 찾아서였고, 진실을 꼭 밝혀내고싶은 소망을 간직하고 있긴 하지만, 뚜렷한 복수심과 분노로 자신을 힘들게 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동이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좀 더 귀한 생각을 품고 좀 더 값진 일을 하고싶다는 희망을 품고있다. 그래서인지 동이가 장금이보다는 더 행복해보이고, 앞으로도 장금이보다는 고생을 좀 덜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한다.

 동이가 숙종을 둘러싼 여인천하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시작하는 게임인 만큼, 고생은 적당히만 시키고, 그저 밝고 행복한 장면을 많이 보고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무거운 역사의식도 내려놓고, 성공도 복수도 훌훌 던져버리고, 풍산동이와 깨방정숙종의 달달한 로맨스에 흠뻑 빠져있고싶다는 말이다. 

 사극이라고 해서 만드는 입장에서나 보는 입장에서나 꼭 경직되고 심각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말이다. 긴장을 풀고, 좀 더 밝고 행복해져도 상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드라마인데...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이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명랑 로맨틱 사극 '동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