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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마니아

종합병원2에 대한 투정


1994년, 대구일신학원과 시립중앙도서관, 동성로 등지에서 서식하던 위기의 재수생에게, 평소보다 조금 일찍 귀가하여 불꺼진 거실에서 혼자 보던 '종합병원'은 일요일밤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이면 학원 교실은 '종합병원'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고, '이과서울대반' 여자애들의 절반이 신은경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종합병원'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자막으로 뜨는 '의학용어'를 따라가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습니다.
'종합병원'의 촬영지였던 '아주대병원'은 드라마의 성공으로 크게 이름을 알리면서, 그해 아주대 의예과는 전국 최고의 경쟁률(물론 복수지원이었긴 했지만...)을 보이기도 했죠.  
현역 때, 재수 때 모두 공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어쩌다 의대를 진학하게 되었고, 병원실습을 나가고 수련의 생활을 할 때까지도 '종합병원'의 환영은 줄곧 저를 따라 다녔습니다.

'종합병원'은 실제 취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드라마였던 만큼, 실제 인물을 모델로 만든 역할들이 많았고, 그래서 더 생동감있는 캐릭터가 만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여자가 외과를 하는 경우가 지극히 드물었던 그 시절, 신은경이 연기했던 이정화 역의 모델이 된 여자 선생님(신촌 세브란스 일반외과 레지던트)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는데, 인턴기간 중 파견 나간 병원에서 스탭으로 계시는 그 선생님을 실제로 보고 무척 설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종합병원'이 씨즌2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반가움이 큰건 당연했습니다. 본편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상당수가 출연을 약속했고, 진정한 의미의 씨즌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제작진의 설명에 기대감은 더욱 커졌지요.

14년만에 돌아온 '종합병원2'... 일단 반갑기는 했습니다.
스탭이 된 김도훈 역의 이재룡 외에도, 성질 급하지만 호탕하셨던 황지만(심양홍 분) 과장님이 부원장님으로 돌아오셨고, 애물단지 레지던트였던 김도훈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사려깊은 정도영 선생님(조경환 분)은 외과과장이 되어계셨습니다. 그리고, 독사 박재훈(오욱철 분)과 맞짱 뜨던 마간호사(김소이 분)는 외과수간호사로 병동을 호령하고 있숩니다.

허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을 좀 더 만나보고 싶은데, 더이상 보이지가 않네요.
 
일단은 '신은경'이 없는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종합병원'하면 '신은경'인데 말입니다.
김도훈의 대사를 통해 이정화란 이름이 잠깐 언급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아쉬움이 해소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그리워질 뿐이었습니다.
김도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눈물짓던 간호사 김지수도, 수줍은 천사표 간호사 전도연도 보이질 않습니다. 주접쟁이 작업꾼 박형준도, 덜렁이 인턴 구본승도, 얄밉기만 했던 내과 레지던트 홍리나도, 여성스러우면서 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 신은경과 대조를 이뤘던 박소현도, 마음만 착했던 찌질이 레지던트 주용만도, 현실적이지만 마음은 따뜻한 통큰 수간호사 최란도 없습니다.
촬영지도 과거의 '아주대병원'에서 새로지은 '강남 성모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은 사람들보다 떠난 사람들이 더 많은 종합병원은, 향수를 자극하기 보다는 그리움만 더해주네요.

그럼,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를 채운,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볼까요?
의과대학이 전문대학원으로 바뀌고, 편입생이 늘면서, 수련의의 평균연령이 조금 높아지고 있는건 사실입니다만, 혹시라도 그런 분위기가 반영되었다고 하더라도, 1년차들이 아무래도 너무 올드해보입니다.
법대 졸업하고 사법시험까지 패스한 후 다시 의과대학을 마친 김정은은 뭐 그렇다 칩시다. 76년생의 차태현은 아무리 절대동안을 지녔다고 해도 1년차의 미숙함과 풋풋함을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백현일(전광렬 분)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 백현우 역의 류진(72년생)도 의대6년과 인턴1년을 수석으로 마친 엘리트로 보이기 보다는, 삼수 끝에 의대 가서 본과 몇번을 유급하고, 레지던트 떨어져 군대까지 다녀온 뺀질이 아저씨처럼 보이구요.
꼭 '뉴하트'의 김민정과 지성 같은 배우와 굳이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이 아저씨들이 레지던트 1년차로 나오는건 누가봐도 좀 우스꽝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아직 주변 인물들이 많이 부각되지 않았는데, 회를 거듭하면서 다른 캐릭터들이 살아나면 분위기가 좀 바뀔까요?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서 찾지 못했던 참신함을 드라마 내부에서 찾을 수 있을지, 그 안을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빠른 호흡과 센 영상의 작품들에 너무 길들여져온 탓일까요? 
'종합병원'은 일일 드라마나 시트콤처럼 느리고 쳐집니다. 따뜻한 휴머너티를 위해 다이나믹한 속도감을 포기해버린걸까요?
뭐 그렇다고 짠하게 느껴지는 감동도 아직은 없습니다. 다른 메디컬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국내 메디컬 드라마의 효시가 되었던 '종합병원'이, 메디컬 드라마의 종합 편집판이 되어버린걸까요?

한 시절 내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고, 내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드라마였던 만큼, 저는 애정을 갖고 '종합병원2'를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종합병원'은 내게 허전함과 씁쓸함만 안겨주는군요.

'추억'을 무기로 돌아온건가요? 그래서, '참신함'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셨나요?
하지만, 그때의 '전도연'과 지금의 '전도연'이 다르듯, 14년이란 시간 동안 시청자들의 눈높이도 그만큼 많이 변했다는걸 아셨어야죠.

참신함도, 추억할 것도 부족한 이 드라마는, 고즈넉한 7080 콘서트 무대에서, 서태지 없는 아이들이 공연하고 있는 것 같은 쓸쓸함을 줍니다.
그리고, 그나마의 '추억'만을 붙잡고 보고있기에는...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