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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마니아

신사의 품격 - X세대 남자들의 판타지

 

 

 

 

 1994년, 신은경이 '내 나이 20과 1/2'이라고 쉬크하게 외쳤던 그때, 나는 '18과 1/2'의 재수생이었다.

 버스를 타면 기사 아저씨의 눈치를 무릎쓰고 어머니가 손수 커터로 잘라주신 학생용 회수권을 고수하면서도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는 당당하게 보러 들어갔던 다중이였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주변인이었지만, 영화 '젊은 남자'의 포스터 속에 웃짱 깐 이정재 같은, 멋지고 섹시한 'X세대'에는 꼭 끼고싶어했던 못말리는 청춘이었다.  

 (위의  동영상과 사진 속에 있는) '레쎄'의 신은경과 '트윈 X'의 이병헌, 김원준은 X세대의 상징이었다. 그 화장품을 쓰면 그들처럼 감각있고 세련된 X세대가 되는 줄 알았다. 부족한 용돈을 딸딸 끌어모아서,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벤치마킹한) 대구 동성로 뒷켠의 오렌지골목에서 '파르페' 정도 마셔주면 그 순간만큼은 압구정 오렌지족이 부럽지 않았다.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있는 카페(당시, 고급 카페의 기준이었다.)에 가면 친구 아무개에게 삐삐 한통쯤 쳐주는건 기본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재수생활이 끝나고 대학에만 가면, 닭벼슬머리를 하고 백팩에 긴청치마를 입은 도도한 고소영을 쫓아다닐 수 있고, 단아한 단발머리에 두꺼운 원서를 왼팔에 살포시 안은 박소현이 미팅에 나와서 수줍게 인사를 할 것만 같았다.

 

 90년대 중반에 청춘의 절정을 보냈던 X세대들이라면, 드라마 '신사의 품격'의 매회마다 서막을 여는 '프롤로그'에 빵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사의 품격'은 딱 우리 세대 이야기다. 한때 'X세대'였던, 그리고 아직도 마음 속엔 청춘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성장기 중년'들의 이야기다. 

 

 

 '신사의 품격'은 또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인기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남성판이라는 별칭을 허락해도 좋을 듯 하다.

 사극, 정치, 범죄, 법정, 스포츠, 액션, 조폭 드라마 등을 제외하고는 드라마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남자들의 세계가 은밀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가끔은 아주 훈훈하게 그려진다. 뒤집어지는 웃음과 가슴 찡한 눈물도 있다.

 남자들이 중심이 되는 드라마도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경쾌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와 그녀의 친구들처럼 살 수 없듯이, 모든 남성들이 '김도진'과 그의 친구들을 쫓아갈 수는 없다. 강남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지금도 가장 핫한 동네에서 가까이 모여 살고있고, 다들 번듯한 직업도 갖고 있다. 현실에서라면 눈코뜰새 없이 바쁜 직종에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아주 여유롭게 자주 뭉쳐서 시간을 보내며 수다를 떨고, 넷이 함께하는 식사와 술자리도 자주 갖는다.

 저들 부럽지 않는 고교 시절 친구가 영 없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다들 생업과 가정생활에 바빠서 1년에 한두번도 얼굴 보기 힘든 입장에서는 저들의 친밀한 동행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남자의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남자들의 '로망'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김도진의 연인, 서이수는 대다수의 남자들이 여자에게 바라는 미덕들이 아주 충실하게 골고루 담겨진 인물이다. 그리고 돈 많고 능력 좋고 화끈한 연상녀 '박민숙', 섹시한 요부 스타일의 '홍세라' 역시도 남자들이 흠뻑 빠지고도 남을 매력을 고루 갖췄다. 물론 남성 판타지의 정점을 찍는 것은 '임메알'이지만 말이다. 어리고 예쁜데다가 애교까지 많은 부잣집 딸인데, 열일곱살 연상의 남자를 짝사랑하는 그런 비현실성마저 갖췄으니 남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환타지아가 또 어디있단 말인가?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저렇게 매력적인 여인들의 사랑을 받는, 잘 나가는 신사 4인방에게 질투를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드라마를 꼭 그렇게 실눈 뜨고 볼 필요는 없을 듯 하다.

 팍팍하고 고단한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 남자들도 이런 드라마 하나쯤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남자들이 원하고 상상하는, 그런 좋은 것들이 가득 담겨있는 판타지, 상상만으로도 황홀했던 것을 가장 매력적인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간접체험할 수 있는 드라마 말이다. 

 여자들에게 '캔디형 인물이 멋진 왕자를 만나는 신데렐라 스토리'나 '남편의 사랑을 못받고 이혼한 아줌마가 매력적이면서 능력도 좋은 연하남(주로 실장님)의 구애를 받는 줌마델라 스토리'가 현실의 괴로움을 위로해주는 판타지가 되어주는 것처럼 말이다.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수컷의 습성 그대로 이 네 남자들에게 라이벌 의식 비슷한 걸 느끼며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좌절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저들에게 위화감 따위를 느낄 필요도 없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닌 드라마 속에 존재하는 인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긴장을 풀고, 이 말랑말랑한 환타지를 그냥 즐기면 되는 것이다.

 

 남자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데다, 우리같은 X세대들에겐 '개콘'보다 더 빵터지는 웃음을 주는 공감의 추억코드까지 품고 있는 '신사의 품격'은 X세대 남자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다. 멋진 남자들이 가득 나오고 은밀한 남자들의 세계도 엿볼 수 있는만큼 여성분들에게도 물론 좋은 선물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꼭 X세대가 아니어도, 세대를 넘어선 재미와 볼거리를 가득 담은 웰메이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 너무 재미있는데, '섹스 앤 더 시티'처럼 여섯 시즌까지는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시즌2는 가는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