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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구숫당근

이선희와 고음

 
'이선희'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시원함이다. 막힘없이 내지르는 직설적인 고성은 청량음료 같은 상쾌함을 주었고, 실제로 그녀는 데뷔 후 수년 동안 '코카 콜라', '체리 코크', '칠성 사이다', '탐스' 등의 청량음료 모델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원하게 내지르는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은 이선희는 바로 같은 이유로 그 음악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맑고 높고 풍부한 그녀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던 만큼, 메가톤급 성량을 자랑이라도 하듯 힘껏 불러재끼는 그녀의 노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선희도 그 문제를 고민했다. 1991년에 펴낸 자서전 '꿈이여 사랑이여 만남이여'에서도 밝혔듯이 그녀는 '다이내믹하고 파워 넘치는 가수'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벗고 '호소력이 짙은 가수'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녀의 그런 고민은 1990년에 출반된 6집 앨범에서부터 드러난다. 조하문으로부터 받은 강한 비트의 락 발라드 '왜 나만'이 빠른 속도로 사랑을 받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돌연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으로 타이틀곡을 바꾸어버린다. 각 차트에서 1위 진입을 눈 앞에 두고있던 '왜 나만'을 밀다가 갑자기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을 부르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그녀의 개인적 고민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준비 중에 있던 몬트리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은 이전의 히트곡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노래였다. 동양적인 서정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직설적으로 강하게 다가오던 기존의 노래들에 비해선 약간 힘을 뺀 듯한 완곡이 느껴졌고, 기존의 시원함과 명쾌함보다는 다소곳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은 이전 히트곡인 '알고싶어요', '나항상 그대를', '나의 거리'에 비해서는 큰 히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당시 인기가요 순위에서는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했던 '가요톱10'에서 1위를 하기는 했지만, 3년 연속 골든컵 수상에 실패했고, 그 해 이선희에게 골든 디스크상을 안겨준 앨범은 1990년에 발표된 6집이 아닌 그 전 해인 1989년에 발표된 5집이었다. (1989년 발표된 5집 앨범은 그 해에는 '나의 거리'가, 그 다음 해인 1990년에는 '한바탕 웃음으로'가 사랑을 받으면서, 한 앨범으로 2년 연속 골든 디스크를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선희의 고민은 7집 앨범에서 더 구체화되었다. 당시로서는 너무 앞선 사운드가 아니었을까 싶은 유로테크노풍의 '추억 속을 걷네'가 비교적 조용히 가라앉은 후, 후속곡으로 민 곡은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이었다. 팬 클럽을 비롯한 골수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노래는 송시현 작곡의 '그대가 떠나신 후에'였지만, 이선희가 부른 곡은 속삭이듯 조용히 부르는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이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은 기존의 이선희의 노래와 비교하면, 마치 부르다 만 듯한 노래였다. 그녀의 파워풀한 고음은 사라지고, 가슴을 쩌렁쩌렁 울리도록 강하게 내질러줘야 할 싸비 부분을 목이 매인 듯한 가성으로 처리를 하다니, 이게 과연 이선희 노래가 맞는지 팬의 입장에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어쩌면, 팬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혹자는 이선희의 대중적인 인기가 퇴조한 시점을 그녀의 정계 진출 시기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생각이 다르다. 그 시점은 바로 '고음 없는 이선희 노래'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이선희에게 큰 무대에서 '아름다운 강산'을 힘껏 열창하는 '국민가수' 이미지가 입혀진 것은 그녀의 전성기 시절을 한참 지난 이후의 일이다. 1990년대 이후에 그녀가 발표해 온 노래들보다는 '열린 음악회'를 비롯한 대형 음악회나 국민적인 행사무대에서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는 모습이 더 많이 부각되면서 이선희 하면 '빰빠라 빠빰' 하는 이미지가 고정되어 온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선희는 '내지르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반면, 그녀가 90년대 이후에 발표한 곡들 중엔 마음껏 내지르는 노래가 너무 없었다.

최초로 싱어송라이터로 변신한 10집 앨범에 수록된 '라일락이 질 때'에서도 애써 고음을 참았고, 11집의 '낯선 바닷가에서(혼자 떠난 여행)'에서는 가성을 썼고, 12집의 '이별소곡'도 강한 절정 없이 조용하게 끝난다.

'푸른 하늘'의 '유영석'이 프로듀싱을 하고, '김종서', '양정분', '박진영' 등의 유명 작곡가들이 대거 참여했던 12집 앨범활동 때에는 홈페이지와 팬 카페에서 타이틀곡 '이별소곡'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에 골수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노래는 '김종서'가 작곡해준 '아마...'라는 곡이었는데, 이선희의 샤우팅 창법을 김종서 특유의 감성으로 극대화시킨 곡이었다.
당시, 팬으로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분명 이선희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있고, 이선희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데, 자꾸만 이선희의 색깔을 지우고 이선희 답지 않은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더 안타까웠던 건, 골수팬의 한사람으로서는 '내지르는 이선희'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내지르기만 하는 이선희'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월드컵 응원 무대를 비롯한 큰 행사나 평화음악회 같은 대형공연무대에서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는 이선희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빰빠라 빠빰'의 고정된 이미지로 소모되는 이선희를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실 '이선희'로선 그런 이미지에 편승해가는 것이 더 편리할지 모른다. 이미 우려먹을 히트곡들은 충분하고, '아름다운 강산'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애국적인 노래들을 받아서 큰 행사무대만 골라 다녀도 편하게 가수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선희는 그런 이미지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선희 다운 노래를 불러달라는 팬들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새로운 소리를 찾고 싶어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선희다움'이 아닌 고민하고 연구해서 찾아내는 새로운 '이선희다움'을 얻고 싶어 했다.

2005년에 발표된 '사춘기' 앨범에 수록된 '인연(동녘바람)'은 이선희의 오랜 고민과 이선희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바를 잘 알고 있는 팬들의 목마름이 마침내 조화를 이룬 노래이다. '왕의 남자'라는 변수를 만나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이 알려진다고 반드시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이어가면서, 내지르지 않고 안으로 소리를 당기는 듯 하지만, 더 깊은 울림과 애절함이 묻어나는 탁월한 오리엔탈 발라드 '인연'은 애초부터 큰 사랑을 받을만한 노래였던 것이다.

골수팬으로서 만족도가 높았던 13집 앨범에 이어지는 14집은 어떤 음악으로 꾸며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1월 11일에 방영된 '불후의 명곡 스페셜 - 이선희편 2부'에서 베스트 1위곡인 'J에게'가 소개되기에 앞서서 신MC가 시낭송할 때 배경으로 깔렸던 음악은 1부에 잠깐 소개되었던 제목 미정 신곡의 앞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랑이란 다가가면 달아나버렸다가
떠난 줄 알면 또 어느새 _____는'

'어느새' 다음엔 효과음이 '쿵'하고 울리는 바람에 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
'_____는' 다음으로 1부에 나왔던 부분을 붙여보면, 이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숨멎을 듯 아파했던 가슴시린 기억들
사랑아 가지마라 곁에 있자
이별아 더는 내게 오지마라
사랑도 이별도 되돌아보면
내 인생의 벗이었네'

1절이 이대로 끝이 난다면, 이 노래 또한 '고음 없는 이선희 노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으로는 이 뒤에 좀 더 강한 싸비부분이 있거나, 아니면 점점 샵(#)이 걸리면서 절정으로 갔으면 하는 바램도 있긴 하지만, 이대로 조용히 노래가 끝난다고 해도 그냥 만족하며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늘 새로운 소리를 찾아 고민하고 연구하는 분이시니, '이번에 찾은 소리가 이런거구나' 하면서, 이제는 그냥 그분이 들려주고싶어하는 음악을 편안히 감사하며 듣고싶다.

물론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면 기쁨이 더 크겠지만, 그런 바램은 내 스스로가 팬으로서 이선희라는 가수에게 투사해오던 세속적인 욕망이 아니었나 싶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가수 이선희로 인해 그녀의 팬으로서 덩달아 누렸던 영광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싶은 욕심 같은 것 말이다. 정작 그분은 그렇게 초연하신데 말이다.

노래에 대한 열정만으로 가득 찼던 아이돌 가수에서 새로운 음악적 정체성을 찾아 끝없이 고민하는 한 음악인으로 발전해가는 이선희를 보면서, 45세의 연세에도 여전한 깜찍 동안의 비결은 바로 굴하지 않는 보석같은 열정과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