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제가 수련했던 분당차병원 소아과 송년회에 참석하느라, 늘 빼놓지 않고 생방으로 챙겨보던 연아양 경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DMB로라도 볼 생각이었는데 모임 중에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3차 자리로 옮겼을 때, '연아는 어떻게 되었지?'하고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휴대폰으로 네이트를 접속했는데 첫화면에 '김연아 싱글 쇼트 1위'라고 뜬 문구만 확인하고는 주먹을 불끈 쥐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고, 기쁨의 표현은 짧았습니다.
새벽 3시가 넘어서 귀가를 했는데, 그냥 잘 수가 없어서 인터넷에 올려진 쇼트 프로그램 방송파일을 받아보았습니다.
아침에 바로 출근도 해야했기 때문에 다는 보지 못하고 '마오' 순서부터 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큰 실수는 없이 경기를 끝낸 마오, SBS 해설자는 마오의 점수가 발표될 때까지 말을 아끼는 듯 했습니다. 6차 대회 프리 스케이팅 때, 감점당한 마오의 트리플 악셀을 보며 탄성을 질렀던 진행자분과 동일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마오의 경기 내내 침묵을 지키시더군요.
65.38이라는 점수에 다소 실망한 듯한 마오의 표정이 지나가고, 다음은 조애니 로셰트의 차례. 그녀도 긴장을 많이 했는지, 본인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기대 이하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드디어 등장한 우리의 김연아양. 경기 전에는 꼭 티슈로 콧물을 닦는 모습이 참 귀여워 보입니다. 늘 믿음스런 표정으로 연아를 다독이는 브라이언 오셔 코치의 든든한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까지 안정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힘과 스피드가 있고, 온몸으로 희노애락을 표현하는 김연아의 예술 스케이팅이 시작되었습니다. 연아가 뛰어오를 때 폴짝폴짝 같이 뛰어오르는 브라이언 오셔의 모습이 마음을 더 훈훈하게 합니다.
자신의 장기인 트리플 러츠를 1바퀴로 도는 실수 외에는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직후 김연아양은 눈물을 글썽입니다. 점수가 발표된 후 경기장 밖으로 나가서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김연아양에겐 고국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가 그 어떤 경기보다 부담이 더 컸을겁니다.
해외 기자들은 홈 어드밴티지의 가능성을 얘기했지만, 김연아도 다른 선수들과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시차 적응을 해야하는 입장이었고, 아이스링크도 그녀로선 처음 빙질을 경험해보는 어울림누리였으니, 다른 선수들에 비해 그녀에게 유리한 조건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호들갑스런 언론들은 김연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으로 기사화해 내보냈고, 심지어는 연습 도중 엉덩방아를 찧은 것까지도 '김연아 연습 도중 엉덩방아, 컨디션 난조?' 같은 식의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기사를 내보내니, 어디 마음 편히 몸이나 제대로 풀었겠습니까?
지나친 기대와 관심은, 그런 것들로부터 초연하려고 애쓰는 김연아양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을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저도 김연아의 경기를 보면서 지나치게 가슴 졸이고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금메달을 당연하게 생각해왔지만, 우승까지는 멀고도 험한 여정을 거쳐야하는 '한국 여자 양궁'을 볼 때와 비슷한 심리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번 베이징 올림픽 때에는, 그렇게 당연했던 믿음이 깨지면서 엄청난 공황상태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늘 당당하고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우리 국민들의 당연한 믿음 때문에 한국 여자양궁 선수들이 느껴야했던 부담감을, 김연아양도 비슷하게 느끼게 될까봐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김연아를 바라보는 우리들부터 조금 긴장을 풀고, 조금만 느긋하게 연아양의 경기를 즐기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미 김연아양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으니, 응원도 응원하는 사람의 존재를 알리는 식의 강하고 소란스런 응원이 아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지켜봐주는 조용한 응원이 그녀에겐 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녀를 덜 긴장시키고, 또 스스로 더 깊이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길일 것입니다.
혹시라도 연아양이 약간의 실수를 보인다고 해서 입으로 터져나오는 탄식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말고, 조금만 참고 지켜봐주는 미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회전만 8회를 집어넣었다고 설레발을 치는 마오도 신경쓰지 말고, 너무 과한 국민들의 사랑에 대한 부담감도 떨쳐버리고, 자신의 연기에만 몰입하여 경기 자체를 즐기는 행복한 스케이팅을 보여주기를...
'행복한 스케이터, 김연아'를 사랑하는 우리들도, 조금만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경기를 즐기는 '행복한 관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연아양, 울지 말아요!
연아양은 이미 최고의 선수입니다.
다른 선수들에겐 선망의 대상이고, 당신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있습니다.
연아양도 그 위에서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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