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직의 생활이 싫은 수많은 이유 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휴가가 너무 짧다는 것이다. 대개 일년에 1주일 정도의 휴가를 받는다. 비행기 타고 나라밖으로 나가는 걸 너무 좋아하면서도, 넉넉치 않은 휴가때문에 아시아 이외의 지역으로의 여행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한다. 주6일 근무를 하고 있어서, 주말에 일본이나 홍콩 정도 다녀오는 것도 내게는 요원하다.
그나마도 올해는 1주일의 휴가를 여름과 겨울에 나눠쓰게 되었다. 여름에 받은 휴가 3일 동안에는 식중독에 걸려 대구집에 내려가있던 3일 내내 누워만 있다가 왔다. 가을부터 신종플루의 유행이 시작되었고, 또 그에 따라 예년에 비해서 일반독감접종도 증가했고, 신종플루의 기세가 조금 꺾일 무렵부터는 또 신종플루예방접종이 시작되면서, 특별한 비수기 없는 바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즐거움이 없었던 여름휴가 후, 가을의 선선한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바쁘게 흘러왔던 몇달 동안 내안에 쌓인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여름에 다 쓰지 못한 휴가를 받아서 떠난 2박3일의 도쿄여행은 그런 불타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기간으로 따지면 남들 주말여행 수준이지만, 내게는 천국으로 떠나는 여행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그 여행을 통해 반년치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또 반년치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와야만 했다.
사실 꼭 도쿄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가방 끌고 인천공항으로 향한다는 사실 자체에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
ISETAN MEN'S
TAKASHIMAYA TIMES SQUARE
나는 신주쿠(新宿)에 깊이 몰입되었다. '이세탄멘즈', '마루이멘', '다카시마야 타임즈스퀘어' 등은 나에게 만큼은 그 어떤 관광명소보다 더 매혹적인 어트랙션(attraction)들이었다.
둘째날 해질녘까지 신주쿠에 매혹되어있던 나는 어두워지고나서야 록본기(六本木)에 도착했다.
원래의 계획은 오전에만 신주쿠에 있다가, 록본기로 가서 점심을 먹은 후 록본기힐스를 둘러보고 모리타워 전망대로 올라가 미술관전시를 본 후 해가 질 때까지 전망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기온이 그닥 낮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몹시도 부는 록본기는 이미 어둠에 묻혀있었다. 모리타워가 뿜어내고있는 설레는 조명에 넋을 놓으려는 순간, 멀지않은 곳에서 조금은 촌스런 불빛을 뿜고있는 도쿄타워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래, 내가 도쿄에 있구나!'
토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티켓을 구입하기위한 줄이 꽤 길었다. 한국에서 미리 예매해간 Tokyo City View 입장권은 티켓오피스 옆에 있는 데스크에서 전망대 입장권과 미술관 입장권으로 바로 교환할 수 있었다.
도쿄 시티 뷰에 들어서니 도쿄 타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분이 있었다. 천정에 설치된 카메라로 한번 촬영한 후, 내 카메라로 한번더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 판매가 목적인 듯 보였지만, 어쨌든 사진 구입 여부와 상관없이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니까 혼자 여행하는 나로선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전망대를 돌아다니며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했고, 친구들에게는 도쿄타워와 도쿄의 야경을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 메세지로 보냈다. 갖은 야유와 시기가 돌아왔다.
'의학과 예술'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내 의식 속에서는 '의학'과 '예술'이라는 분야가 쉽게 연결되지 않았고, 더구나 전시회의 테마로는 무척 생경스럽게 느껴졌는데, 이 낯선 주제가 아우르는 영역은 의외로 넓었다.
실제로 300건의 이상의 해부를 했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영국 왕실의 소장품)를 비롯하여, 16세기에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는 해부 극장을 묘사한 작품들,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의사의 초상화 작품들, 신체 내부를 묘사한 각종 그림들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색다른 재미와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과학(의학)과 예술이 만나는 장소로서의 몸'
의학과 예술, 과학과 미를 종합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여,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색다른 의문을 던지는 독창적인 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3부로 넘어갈 때쯤에는 발이 터질 것 같았고, 혈당이 떨어졌는지 손이 떨렸다. 그런 상태에서 마주한 한 사진전시는 나를 전율케 했다.
발터 쉘즈(Walter Schels)의 Life Before Death라는 제목의 전시는 죽음을 선고받은 말기 환자들의 생전 모습과 사후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작품이었다.
뇌종양으로 사망한 중년의 백인 남성, 출생 시부터 종양을 갖고 태어난 여아(twin 중 한명이었는데, 다른 twin은 정상아였다고 함), 주술의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다는 중년의 동양 여성, AIDS로 사망한 30대 백인 남성, 심한 메스꺼움을 느낄 때마다 삶을 멈추고 싶었다는 노년의 백인 여성...
많은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했던 'Momento Mori(언젠가 당신도 죽는다)'를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게 만드는 이 작가의 도발이 처음엔 너무나 당혹스러워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을 사이에 둔 두 얼굴 사이를 너무나 쉽고 가깝게 오가면서 내 안에선 기묘하고 복잡한 정신작용들이 일어났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사후의 모습이 더 편안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피곤하고 배가 고픈 상태였지만, 나는 한동안 그 전시실을 나올 수 없었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사진의 모델이된 개개인의 히스토리를 A4 용지에 출력하여 코팅한 파일묶음 여러 개를 전시실 한켠에 마련해두었다. 나는 전시실 구석에 놓인 소파에서 그 파일묶음들을 다 읽고나서 고인들의 사진을 눈으로 한번씩 더 훑은 다음에야 다음 전시실로 향했다.
의료계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의학이라는 학문은 창의적인 것, 예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나의 경직된 의식 속에도 신선한 빛이 한줄기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리 미술관의 '의학과 예술展'은 이번 여행에서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앞으로의 내 삶에도 적잖은 영향을 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생계형 의사로 살아가고 있는 내게 아직은 막연하고 희미하지만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생각하게 해 준 뜻깊은 전시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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