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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냥본색

우리를 자랑스럽게 했고, 부끄럽게도 한 연아의 연설

 2010년 9월 18일(한국시각) UN 세계 평화의 날 기념식 행사에 유니세프 국제친선대사 자격으로 참석한 김연아 선수는 '세계 평화와 스포츠의 관계'에 대한 연설을 했다.
 세계에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날 연설에서 김연아는 '평화는 젊은이들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인생의 다음 도전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운동선수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세계 평화에 접목시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평화가 있는 곳에 문화가 존재할 수 있고, 문화가 있는 곳에 평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피겨 스케이터, 즉 운동선수로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평화가 있어야 스포츠가 존재할 수 있고 스포츠가 있어야 평화도 있다고 말입니다. 전설의 피겨 스케이터들의 연기를 보고 자라면서, 저는 미래에 대한 꿈과 목표를 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0 동계 올림픽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선수들이 스포츠맨쉽과 페어 플레이 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번 평화의 날 행사도 여기 모인 모든 분들에게 평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한국에서 온 스무살짜리 피겨 스케이터가 세계 평화의 의미를 되짚는 뜻깊은 행사에서 전세계에서 모인 젊은이들을 상대로 '세계의 번영과 미래의 희망을 위한 세계 평화'에 대한 연설을 펼쳤던 바로 그날, 그녀의 고국에서는 '김연아 새 코치 2명으로 압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각종 TV 뉴스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모든 매체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김연아의 새 코치'를 제목으로 달고 있었고, 반기문 UN 사무총장과 안소니 레이크 UNICEF 총재를 비롯한 UN 평화 사절과 함께 참석한 '평화의 종 타종행사'나 UN 본부에서 열린 세계 학생들과의 대담 자리에서 김연아가 영어로 연설을 펼쳤다는 보도는 '코치'에 관한 보도 내용에 곁다리로 언급되어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연아가 세계 젊은이를 향해 전한 세계 평화에 관한 메세지가 훨씬 중요하고 가치있어 보이는데, 기사들은 일제히 '코치' 이야기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연아가 어디를 가건 그렇게 '은퇴'에 대해서만 물고늘어지더니 이젠 '코치' 문제다. 연아가 운동선수인 만큼 연아의 새 코치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그 관심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다.
 피겨 올림픽 챔피언으로서, 그리고 세계 젊은이들의 롤 모델로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해보려는 연아의 노력에 대한 관심은 뒷전이고, 뉴욕 특파원이란 사람들이 UN씩이나 찾아가서 리포트한 기사들이 하나같이 코치 이야기 일색이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아는 어린 나이에 자신이 얻게된 영향력을 보다 가치있는 일에 쓰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는데, 주변의 어른들은 여전히 그녀를 숨가쁜 컴피티션의 긴장 속에만 가둬두려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연아는 그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한 선수이다. 이미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용맹한 호랑이 같은 서슬퍼런 승부사 기질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이젠 룰에 얶매이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다양한 연기를 펼치고 싶다'고 말하면서 승부근성을 감추고 있지만, 그녀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고 판단될 때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는 선수이다. 주변에서 그렇게 걱정하거나 채근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도 그녀가 알아서 잘 해왔듯이, 앞으로도 그냥 내버려두면서 지켜보면 알아서 잘 해갈 것이다.

 2010년 9월 18일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피겨 챔피언이 UN본부에서 한 연설을 들으며 같은 한국인으로서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고, 한편으론, 자국 출신의 운동선수가 세계적인 행사에서 전세계 젊은이들을 향해 전한 세계 평화의 메세지는 안중에도 없이 코치 얘기로만 떠들썩한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