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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냥본색

김연아의 새로운 시작

 오늘 아침에 언론을 통해 예고된 김연아 선수의 긴급 기자회견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심스런 태교 모드로 오후 3시가 되길 기다렸다.

 

 

 진료실 컴퓨터로 '오 마이 뉴스' 사이트에서 생중계 되는 화면을 통해 김연아 선수의 입장 발표를 지켜보았는데, 보는 내내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줄곧 마음을 졸이며 듣고 있다가, 연아 선수의 입에서 '선수생활의 목표', '포기한다면 후회' 같은 말들이 나오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연아 선수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할 생각이었지만, 속마음으로는 현역을 유지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컸었나 보다. 

 

 

 

[다음은 오늘 김연아 선수가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입장 전문이다]

 

안녕하십니까.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연아입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 자리에 와주신 기자 여러분들에게 감사합니다. 기자 여러분들을 모신 이유는 제가 오늘 저의 향후 진로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지난 시즌을 스킵했고 또 시즌이 끝난지 3개월이 흘렀지만 사실 지난주까지 향후 진로문제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차례 말씀드렸던 것처럼 벤쿠버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 피겨스케이팅 선수로서 더 높은 목표를 찾기 힘들었고 그와 반대로 저에 대한 국민들과 팬분들의 관심과 애정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의 관심과 애정은 오히려 저에게는 큰 부담으로 느껴졌고 하루만이라도 그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게 솔직한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저의 인터뷰 말 한마디 한마디, 또 외부에 비춰지는 모습 하나하나가 여러분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때마다 저는 그 관심에서 조금이라도 한발짝 물러나 있고 싶었습니다.

또한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몸상태와 기술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고된 훈련을 계속해야 할까. 또 대회에 나가서 행여 실수라도 해서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를 얻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압박감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훈련과정과 대회 결과에 대한 부담감을 극복할 수 있는 모티브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지난 시즌을 스킵한 이후 1년 동안은 저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1년동안 태릉선수촌에서 피겨스케이팅 후배들과 함께 훈련을 해왔습니다. 제가 후배선수들에게 피겨스케이팅과 훈련에 관련된 조언도 해주고 선배로서, 언니로서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반대로 후배들의 훈련모습에 자극받기도 하고 때론 피겨스케이팅을 계속 해야 하는 동기붕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피겨스케이팅을 위해서 제가 현역선수로서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남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계속 짓눌러왔던 저의 선수생활 목표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선수생활을 지속하기 힘겨웠던 것이 내 스스로의, 또 국민과 팬들의 높은 기대치와 그에 따른 부담감이 아닐까. 내 스스로가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오직 내 자신만을 위한 피겨연기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만일 최고의 목표에 대한 부담으로 선수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그 결정에 대해 후회하고 이것이 인생에서의 큰 아쉬움으로 남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제 밴쿠버올림픽 금메달 선수가 아닌 대한민국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연아로 새출발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저를 올림픽금메달리스트가 아닌, 후배선수들과 똑같은 국가대표 김연아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소치올림픽에서 현역은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의 선수생활 종착역을 밴쿠어올림픽으로 정했지만 저는 이제 그 종착역을 소치올림픽으로 연장시키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려 합니다.

아울러 소치올림픽에서의 현역은퇴는 IOC선수위원을 향해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난해 평창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면서 IOC선수위원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꿈을 키웠습니다. 어쩌면 소치올림픽에서의 현역은퇴는 저의 새로운 꿈과 도전을 위한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입니다.

소치올림픽이 되면 18년이 될 피겨스케이팅 선수생활의 아름다운 끝맺음을 위해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문일답]


-소치올림픽 출전 결정했는데 러시아 선수들의 기량이 올라오고 있다.

러시아 선수들은 후배들의 라이벌이다.
(필자의 마음에 가장 드는 멘트입니다~^^ 역시 여왕님은 멋집니다!) 후배들의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눈여겨보기는 했다. 이미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목표가 아닌,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야 하는 과제가 있다. 국제대회 참가해서 성적을 거둬 올림픽 티켓을 2장 이상 따는 것 목표로 할 것이다.

-소치 올림픽 대비 코치진은.

▲지난주까지 고민했고, 결정한 지 얼마 안 돼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까지 없다. 코치 문제도 그렇고 하지만 안무가 윌슨과는 계속 간다. 구체적 프로그램과 안무는 없다.

-훈련 계획은.

▲태릉에서 계속할 예정이다.

-본인의 기량과 컨디션은.

▲밴쿠버 때의 컨디션까지는 몇 년이 걸린 상태였다. 한 시즌 쉬었고, 경기력과 컨디션은 이제 시작이다. 만들어나가야 한다. 시즌까지 반년 정도 덜 남았는데 그 기간 아예 쉰 건 아니기 때문에 되찾기 위해서 훈련에 집중할 것이다.

-새로운 목표 찾은 계기는.

▲훈련이 고되고 결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저어했다. 아쉬움도 남았고, 혹시 잘 할 수 있는 선수 생활을 부담,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많이 후회할 것 같았다.

-복귀 배경에서 IOC 선수 위원에 대한 포부가 큰지, 우리나라의 올림픽 출전권 따기 위해서인지.

▲한 가지 이유는 아니다. IOC 위원 자격도 있고, 선수로서 아쉬움 때문도 있고, 부담감이나 결과에 대한 포기는 아쉬움도 남는 거 같아서 스스로 기대치 낮추고 목표 설정을 낮춘다면 편하게 경기할 수 있고 올림픽 챔피언이니까 잘 해야 되기보다 순수한 국가대표로서 최선을 다해 경기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카타리나 비트에 대한 경쟁심이 있나.

▲그런 건 별로 영향은 없고, 카타리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올림픽 출전했다. 당시 피겨는 지금과 다르다. 그런 이유보다 자신만의 생각에서 결정했다. 그런 영향은 없었다.

-6개 그랑프리 대회 출전 명단에서 빠져 있다. 앞으로 어떤 대회에 출전할 것인지.

▲그랑프리 시리즈는 지난 시즌 성적 없어서 명단에 올라오지 않았다. 명단에 있었어도 10월 중순이면 시즌 시작되는데 준비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출전 안 했을 것 같다. 정해진 목표는 국내 종합선수권대회다. 월드 챔피언십은 국제대회 성적이 필요하다. 시즌 중 뛸 만한 컨디션이 될 때 나갈 국제대회를 체크해보고 참가할 예정이다.

-밴쿠버올림픽 성적 깰 생각 있나.

▲최상의 컨디션에서 베스트 연기를 해서 나온 점수였다. 올림픽이었고 깰 수는 없을 것 같은 점수기 때문에 메달 따기보다 올림픽에 다시 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할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날 수 있지만 버린 지 오래고, 그렇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할 생각이다.

-쉬면서 어떤 점을 느꼈나.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피겨 공연도 했지만 학교 생활을 한다든지, 오랫동안 갖지 못했던 일상을 즐길 수 있던 시기였다. 진로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마음에 와닿았던 조언이 있었나.

▲주변에 조언해준 분들이 너무 많았다. 선수 생활만 많이 해왔고 경험이 부족하고 어려운 결정하기에는 어리기 때문에 주변 분들이 조언 많이 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조언 있었지만 많은 영향 미친 것 같다.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

▲결정에 대해서 아는 분이 거의 없다. 후배들도 모른다. 언니 오늘 기자회견해요? 은퇴하나? 그런 얘기를 했는데 겉으로는 맞다고 했다. 주변 분들에게는 거의 안 한 상태다.

-대외 활동 병행 계획은.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훈련량이 늘기 때문에 활동들은 계속 상의 하에 결정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훈련이 중심이 돼서 활동을 하지 않을까 싶다.

-국내 대회 참가는 굉장히 오랜만이다. 후배들에게 현역 연장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국내대회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대회다. 당연하게 생각한다. 4~5년 동안 캐나다 토론토에서 하다 태릉에서 오랜 기간 후배들과 훈련했다. 애기 때 봤다가 다 커서 훈련하고 부상도 있고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후배들 보면서 안쓰럽기도 했다. 그 나이 때 더 열심히 하는 모습도 보였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연습하고 있을 때여서 자극을 받았다. 그들만의 올림픽 도울 수 있을까 생각도 있다. 밴쿠버 때 곽민정이랑 나간 것처럼 후배 선수와 같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추억,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점이 힘들 거라 예상하나.

▲체력적으로도 심적으로 힘들 것 같다. 한 시즌 쉬었기 때문에 공연은 해왔지만 경기와는 다르다. 경기를 나간 지 꽤 오래 돼서 경기 감각이나 지난해 4월 모스크바 때도 조금 연기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감각 살리는 게 어려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아직 시간 남았지만 거의 2년 간의 공백이다. 그걸 되찾기 위해 노력할 텐데 결과적인 것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잘 해야 겠다는 것보다 오랜만에 온 만큼 최선 다하고 후회없이 다양한 캐릭터 보여줘야 겠다. 응원해달라.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이, 그야말로 곧이곧대로다. 조금만 꾸며서 얘기해도, 좀 더 그럴 듯 하게 포장해서 얘기할만도 한 내용인데, 어찌 보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입장 표명이다. 역시 여왕님답다.^^

 4년이 넘는 시간을 자칭 승냥이로 연아선수 곁을 지켜온 나로선 연아선수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냥 구구절절히 와닿는 듯 하다.

 

 혹시라도 부담을 주게 될까봐 침묵을 지키면서, 때론 연아선수가 느꼈다는 그 부담과 공포를 함께 느끼며, 승냥친구들은 그렇게 묵묵히 그녀의 결정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그 답을 들었다.

 

 스스로 승냥이로 자부한 나마저도 올림픽 직후에 열린 '토리노 세계선수권대회'가 연아선수를 시합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이미 했었다. 그 다음해 일본 대지진으로 한달 넘게 연기된 후에 열린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 후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넘치는 듯한 그녀의 뜨거운 눈물을 보았을 때에도, 그것이 포디움에 선 그녀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없는 두번의 피겨 시즌이 쓸쓸하게 지나가는 동안, 아주 깊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기도 했었고 말이다.

 

 돌아오는 소치 올림픽에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는 결과에 대한 부담과 욕심을 버리고, 올림픽 챔피언으로서가 아닌 국가대표 스케이터로서의 순수한 목표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연아선수를 따라서 나 역시도 기대와 걱정을 모두 접어두고 그저 순수한 팬으로서 그녀의 훈련과 경기를 응원하고 싶다.

 그녀의 컴피티션 무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새로운 프로그램과 코스튬을 보며 핡핡거릴 수 있는 시간이 2년 더 연장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덤, 또는 큰 선물을 받은 듯 하다.

 

 올림픽 무대에 앞서 열리는 월드 챔피언쉽에 그녀가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어 주는 것은 후배 스케이터가 올림픽에 함께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이니 만큼,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를 앞둔 국내 피겨계에도 그녀의 현역 유지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실제로, 지난 시즌 곽민정이 혼자 출전해서 티켓을 받아오지 못한 다음 시즌의 월드 챔피언쉽에는 한국 선수 1명이 나가서 예선부터 치뤄야 한다고 들었다. - 글을 올리고 난 후에 안 사실인데, 이 부분은 ISU 규정이 바뀌어서 예선부터 치르는 것이 아니라 ISU가 인증하는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일정 점수 이상의 기록을 세워야 한다고...) 그녀 없이는 올림픽 출전 여부도 불투명한 국내 피겨계를 아직 좀 더 지켜주어야 평창 피겨 꿈나무들의 미래도 내다볼 수 있는 현실이, 그런 부담을 그녀가 아직 짊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이 안쓰럽고 미안하다. 그러나 연아선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런 역할과 부담마저도 아주 어른스럽고 성숙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녀가 출전하게 될 국내 종합선수권대회 티켓 예매처는 아마 승냥이들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늘 관계자들과 소수의 피겨팬들만 자리했던 국내 내셔널대회의 초라한 객석은, 피겨여왕의 컴피티션 복귀 무대를 보기 위해 모여든 팬들로 넘쳐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마음이 너무 앞서가는 것 썩 바람직하지는 않은데, 오늘만큼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마음껏 기분좋은 망상에 빠져있고 싶다.) 

 

 사뭇 먼 길을 돌아온 듯한 느낌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연아선수가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스케이터'의 길로 들어서는 듯 보여서 기쁘고 행복하다. 부담감과 두려움에 맞서 용기있는 선택을 해준 연아선수에게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싶다. 

 컴피티션의 부담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있던 그 시간이 그녀에겐 그렇게도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시간마저도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게 지켜주지 못한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다.

 

 스스로에게나, 주변 사람에게나 자주 얘기하는 말이지만, 나에게 연아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주는 나만의 주문'이다. 머릿속에 해결되지 못한 갈등이나 고민이 가득할 때면 나는 늘 이렇게 외친다. '연아, 연아, 연아~!'

 

 그녀가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걸어준 그 긍정의 마법을 이제 자신을 위해서도 마음껏 써주길 바란다.